다음 두 문장을 보자.

  1. 기성용은 한혜진의 남편이다.
  2. 한혜진은 기성용의 아내다.

위의 두 문장은 겉보기에는 서로 다르지만, 결국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에는 다음 세 문장을 보자.

  1. 나는 배고프다.
  2. I am hungry.
  3. J’ai faim.

세 문장 역시 겉보기에는 다른 형태를 취하지만, 의미는 모두 동일하다. 이처럼 문장이 여러 개라도 그 문장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서로 같을 수 있다.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 혹은 문장이 실제로 주장하는 내용을 “명제”라 부르고, 명제를 표현하기 위해 단어들을 어법에 맞게 배열해놓은 것을 “문장”이라 부른다.

이번에는 다음의 문장을 보자.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은 기업인 출신이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인 2015년 기준으로, 이 문장이 담은 명제는 거짓이다. 하지만 동일한 문장을 2010년에 말한다면, 명제는 참이 될 것이다. 이처럼 동일한 문장 혹은 명제라도 이를 둘러싸고 있는 맥락에 따라 참/거짓 여부, 의미 등이 달라질 수 있다. 즉, 2010년에 위의 문장을 말하는 것과 2015년에 위의 문장을 말하는 것은 각기 다른 “진술”이 된다.


http://spirituallythinking.blogspot.kr/2012/03/clarity-charity.html

자비의 원리[1]란,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일 때 상대방의 의도를 최대한 유리하게 추론해야 한다는 규칙이다. 만약 상대방의 논증에서 숨겨진 전제 또는 결론이 존재한다면, 그것 또한 원래의 의도에 맞도록 추리하여 끼워넣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때에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비판만을 가하게 된다. 결국 이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로 연결되고, 실제로 이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긴 것이라 착각하게 된다.

자비의 원리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비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선의의 자세로 토론에 임하는 것이므로, 토론의 목적 자체가 더 나은 대안의 모색 혹은 진리 추구가 아닌 경우에는 자비의 원리가 지켜지기 어렵다.

자비의 원리를 사용할 경우 상대방의 잘못된 주장에 대한 더욱 철저한 논박이 가능하다.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경우 이겼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비의 원리를 사용하면 더욱 좋은 결론을 낼 수 있지만, 반드시 자비의 원리를 사용해야만 좋은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산파술을 들 수 있다.

소크라테스 : 자네는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트라시마코스 : 강자의 이익이 정의입니다.
소크라테스 : 강자도 물론 사람이겠지?
트라시마코스 : 예, 그렇지요.
소크라테스 : 그럼 강자도 실수를 하겠군
트라시마코스 : 네
소크라테스 : 그럼 강자의 잘못된 행동도 정의로운건가?
트라시마코스 : ………

질문을 통해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분명 자비의 원리에는 크게 어긋난다. 왜냐하면 그는 상대방의 의도에 맞게 숨겨진 전제를 추리하지 않고, 의심되는 부분을 굳이 들추어내어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파술은 분명 답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더 나은 답변을 찾도록 도와 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산파술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질문하는 사람이 좋은 질문을 해야 하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이 산파술로써 대화를 이끌어내기란 매우 어렵다. 즉,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비의 원리를 준수하는 편이 더욱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1. 영어로는 principle of charity라 쓰고, 간혹 “자비의 원칙”이라 부르기도 한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