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2017년 한 해 들어 벌써 36건의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비록 36건 모두가 하급심의 판단이기는 하지만, 대체복무제 등 대안을 필요로 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1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진 것은 2004년이다. 당시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근무하던 이정렬 전 부장판사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 오모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해당 사건 판결문이 공식적으로 공개되어 있지는 않지만, '병역거부 아카이브'라는 사이트에서 판결문을 찾아볼 수 있었다.
사건번호 서울남부지방법원 2002고단3941
병역법위반 선고일 2004-05-21
양심의 자유는 양심형성 및 결정의 자유, 양심을 지키는 자유, 양심실현의 자유를 그 내용으로 하는 바 양심실현의 자유는 양심의 결정을 행동으로 옮겨서 실현시킬 수 있는 자유인 것으로 결국 양심상의 결정을 이유로 한 병역거부는 양심을 지키는 자유의 내용을 이루는 작위의무로부터의 해방과 양심실현의 자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병역법상 입영거부행위가 오직 양심상의 결정에 다른것으로서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적 보호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경우에는 병역법 제88조제1항 소정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당 사 자】
피고인 오○○
【판 결 선 고】
2004. 5. 21.
【주 문】
피고인은 무죄.
이 사건 피고인 오모 씨는 전형적인 종교에 따른 병역거부자로, '여호와의 증인' 교리에 따르면 무기를 들 수 없기 때문에 입영을 거부했다가 기소되었다.
당시 피고인이 위반한 법률은 병역법 제88조 1항이었다.
제88조 (입영의 기피) ①현역입영 또는 소집통지서(모집에 의한 입영통지서를 포함한다)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없이 입영 또는 소집기일부터 다음 각호의 기간이 경과하여도 입영하지 아니하거나 소집에 불응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다만, 제53조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전시근로소집에 대비한 점검통지서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없이 지정된 일시의 점검에 불참한 때에는 6월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에 처한다.
이정렬 판사는 이 조항에서 중간의 '정당한 사유 없이'에 주목한다. 병억법은 입영을 거부한 사람 전원에게 징역형을 처하지 않고, 굳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하지 않은 사람만을 처벌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모 씨의 집총을 거부한다는 개인적 신념을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여, 병역법 88조 1항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 판사가 집총 거부라는 신념을 정당한 사유로 본 데에는 헌법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외에도 국제인권규약 규정, 유엔 인권위원회의 입장 등을 근거로 두고 있다.
또 이 판사는 당시 병역법 제88조 1항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에도 주목하고 있다. 당시 이 조항은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이 신청되어 심사가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법률에 따르면 헌법재판소는 사건이 접수된 날로부터 180일 이내에 판단을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2년이 넘게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이 판사는 병역법 제88조 1항의 일부 위헌성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이 사건을 맡아 판결하게 된 자신에게 그 권한이 있다고 보았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현실적인 요건도 판결문에 포함되었다. 한 해 발생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연 600명 정도로 연간 징병인원의 0.2%에 불과하므로 실제 국방력에 미치는 악영향은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 판사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를 인정할 수는 없다고 명시했다. 즉 "진정한 양심상의 결정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과 "양심을 빙자하여 병역을 기피하는 자"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피고인 오모 씨의 경우, 10년이 넘게 여호와의 증인 신자로 있었으며 그간 성실하게 학교생활 및 봉사활동을 해왔던 사실이 고려되었다. 그러나 만약 오모 씨처럼 본인의 양심적 결정을 뒷받침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나 객관적인 증거가 없었다면, 이정렬 판사의 주장에 의해 "양심을 빙자하여 병역을 기피하는 자"로 판단되어 유죄가 선고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에 이루어진 이 판결의 무죄 선고는 크게 1) 개인적 신념은 '정당한 사유'에 해당 2) 헌재의 위헌 여부 판단이 이루어지지 않음 3) 국방력에 미치는 악영향이 미미함 4) 신념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가 존재함의 4가지 근거에 의존하고 있다. 이 중 2)의 경우 헌법재판소가 병역법 제88조에 대해 여러 차례 합헌 판단을 내렸으므로 현재는 근거가 되기 어렵다. 4)의 경우 여호와의 증인 등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을 보호하는 데에는 사용될 수 있지만, 비종교적 병역거부자의 경우 오히려 4)가 유죄의 판단을 지지하는 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정렬 판사는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이후 층간소음 다툼으로 벌금형을 선고받거나 페이스북에 "가카새끼 짬뽕" 사진을 올리는 등 여러 '튀는' 행보를 보였다. 비록 현재는 법률가로 활동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도 한 법무법인에서 사무장으로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정렬 판사의 판결은 대체복무제에 대한 보다 진지한 논의를 이끌어냈고, 개인의 양심을 국가의 강제력보다 우선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국민의 전반적인 인권을 증진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 양심적 병역거부 올해 36번째 1심 무죄…2015∼2016년의 약3배↑(종합)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1/12/0200000000AKR20171112001951060.HTML [본문으로]